너무나 많은 이유가 있다. 분명하게 밝혀둘 것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필름 색감이 어떠하다’는 그 느낌과 색감을 나는 모른다. 필름 각각의 고유한 느낌은 알고 있다. 특정 필름이 어떤 색을 강하게 표현하는지, 그레인은 어떠한지, 어떠한 상황일 때 어떠한 색상이 더 도드라게 표현되는 지 등의 지점은 알고 있다. ‘필름 고유의 느낌은 이러한 것이다.’ 하는 지점은 모른다. 다시 말해 필름만이 주는 그 느낌이라는 것을 잘 모르겠고 그것을 위해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귀찮다

사진은 그 자체로 목적인가? 수단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내게는 수단이다. 피사체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찍는 사람이 어떠한 감정이냐에 따라 다른 사진이 된다고 믿는다. 내가 남긴 사진이 내 감정을 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찍은 사진이 그 순간의 기억과 함께 그 순간의 감정을 고스란히 다시 느끼게 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내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지 잘 모르기도 하고 잘 알려고 하지 않고 살아온 삶의 시간이 너무나 길다. 그 덕에 병도 얻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자신의 감정을 알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이것과 필름이 무슨 관계인가? 필름으로 사진을 찍은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행위는 매우 익숙하고 어느 필름이 어떠한 색과 어떠한 표현을 하는지, 어느 렌즈가 사진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잘 알고 있다. 이미 익숙하고 잘 다룰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로 사진을 촬영하려면 다시 학습이 필요하다. 필름에서는 조작할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자동에서 수동으로 넘어가면 필름 선택과 조리개, 셔터 속도 말고 조절할 것도 없다. 가지고 있는 카메라 중에서 Nikon F6의 경우 메뉴에 들어가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으나, 이미지와 연관된 설정은 드물고, 요즘 나오는 디지털카메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로 사용하는 Leica M3는 정말 단순함의 끝자락에 있다. 단순하지만, 원하는 사진은 충분히 찍을 수 있다. 기술적으로 잘 찍은 사진보다 자신에게 좋은 사진이 필요한 내게 지금 가진 지식과 기기로 충분하다. 더 공부하고 싶지 않다.

사진을 얻는 과정의 즐거움

필름으로 사진을 만드는 것은 촬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상과 인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든 과정은 익숙해지고 나면 지겹고 귀찮을 수도 있으나, 마지막 단계를 거쳐 사진을 얻었을 때 즐겁다. 다양한 과정을 거쳐 사진을 얻어냈을 때 여러 과정을 거쳐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 느낌과 분위기, 색상의 사진을 얻고 나면 뿌듯하다. 모든 과정이 사람의 손을 거친다. 기계적으로 진행하지 않는, 정형화되지 않은, 그래서 중간 과정의 실수는 곧 사진 결과물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현상과 인화 과정은 시간 조절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전습을 끝내고 현상액을 부은 후, 교반하는 시간, 교반하지 않는 시간, 전체 교반횟수 등은 사진 결과물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필름과 현상액 종류에 따라, 증감 여부까지 고려하여 적절한 시간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사람이 수행한다. 완벽하게 동일한 시간으로 수행되지 않는다. 게다가 내 경우 자신만의 레시피가 있다. 일반적인 교반시간이나 횟수를 따르지 않는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매번 동일하게( 아니 비슷하게 ) 얻어내는 것에 희열이 있다.

물리적인 결과물

인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현상 과정을 마치면 물리적으로 현실에 남는 사진이 생긴다. 인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사진을 수정할 수 있으나, 현상된 필름은 어찌 되었든 상이 맺힌 이미지다.